몽상 주부의 아름다운 일상 디자인아티스트 소은명
인간은 가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장소에서 가만히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디자인아티스트 소은명은 아이를 낳고 나서 그러한 공간이 절실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다 당분간 쓰지 않을 잡동사니들을 올려놓은 장롱 꼭대기의 작은 틈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남편의 물건이 침범하지 않는, 완벽한 장소다. 그녀는 그 위에 의자를 올리고, 앉는다. 온전히 그녀만의 자리다. 숨겨졌던 또 하나의 차원이다.
책장은 꼭 책장일까?
책장은 책을 꽂아놓았을 때야 제 이름값을 한다. 옷장도 그렇다. 필통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를 담아내는 용도의 물건들은, 담겨질 그 무언가를 가리키는 이름을 필연적으로 가진다. 하지만 그 이름들에 꼭 얽매여야 할까? 책장을 접시로 가득 채울 수도, 필통에 캔디를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냥 빈 채로 두고 보아도 좋다면 어떨까? 그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더 고집스러워 보인다. ‘굳이 그렇게 딱딱한 이름은 필요 없잖아?’라고 물어보고 싶게. 소은명은 그 사물들을 주어진 이름,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굳이 책을 꽂아놓지 않아도 그 자체로 괜찮은, 그 무엇을 담아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책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나무가 책이 되고 책이 나무 되네>이다.
“인터랙티브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은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물론 학교에서는 웹이나 영상 분야를 더 중점으로 배웠지만, 진정한 소통은 오프라인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일상에서 매일 손으로 만지고 몸에 닿는 사물들이 우리와 나누는 상호작용은 아주 크고 소중해요.”
2008년 전시회를 시작으로 인상적인 아트퍼니처 작품을 세상에 알린 소은명. 그녀는 스스로의 직업을 ‘디자인아티스트’이라 정의했다. 말 그대로 디자인과 아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녀가 만든 가구들은 제 온전한 기능을 할 뿐 아니라, 그 기능을 모두 다 빼내더라도 하나의 의미 있는 오브제로 남는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인터랙티브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조금 먼 길을 돌아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전공과 무관한 마케팅 회사를 다니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야 첫 작품을 발표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동력에는 그 숱한 삶의 경험이 있었다.
스토리가 있는 가구 만들기
“제 작품들에는 모두 스토리가 있어요. 이를테면 가사일에 지친 주부가 선반 꼭대기에라도 올라가서 느긋하게 쉬고 싶다고 느끼는 감정. 제 첫 번째 작품인 <숨겨진 차원>의 배경이기도 한 이 이야기는 가장 힘들었던 제 실제 상황이기도 했어요. 그때 너무 괴로워서 아기가 잠든 새벽 4시에 산책한다고 거리로 나와 배회했어요.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스케치했어요. 그걸 겪고 나니 흔히들 말하는 ‘예술은 역경 속에서 피어난다.’는 말이 실감나더라고요. 가장 집중해서 폭발적으로 나오는 에너지가 생기거든요. 그 무엇 때문도 아닌, 저만을 위한 에너지가요.”
엄마 소은명은 해산물을 맛있게 먹다가도 20년 후에는 환경오염으로 그것들이 대부분 파괴될 것이라는 정보에 갑자기 우울해진다. 사랑하는 딸에게 너무나 미안해서다. 그녀는 언제나 자연을 동경했다. 가능하다면 언젠가 꼭 작은 정원을 갖고 싶다. 제주도의 바람을 맞으며 살고 싶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멘트 위로 흩날리는 낙엽들이 떨어지기 무섭게 깨끗하게 제거되며, 네모난 아파트 안에서 아마도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나무 모양을 한 책장이다. 아이에게 책이 잎으로, 열매로 자라나는 나무를 보여주면서 자연을 생각하게 해주고 싶었다. 또, 제주의 오름 모양을 연상하게 하는 역시 자연에 대한 소은명의 그리움과 사랑이다. 그의 스토리는 이렇게 소소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절실함이 있다.
카페를 작업실 삼아, 일상을 소재로,
“ 작업은 손이 많이 들었어요. 한땀 한땀 누비를 만들듯 직접 바느질을 했거든요. 힘들긴 했는데, 묘하게 그 과정이 점점 제 자신을 정화淨化시키는 것 같았어요. 마음도 안정되고 편안해지고. 그리고 생각했죠. 제 모든 작업이 결국 이렇게 무언가를 엮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동경하는 것들을 엮고 삶고 엮고 시간도 엮고 디자인도 엮는.” 소은명의 어릴 적 꿈은 발명가였다. 용도가 수상한 물건들을 잔뜩 스케치하면서도 어린 은명은 계속해서 물음표를 만들어냈다. ‘왜 냉장고는 저런 모양일까?’, ‘왜 선풍기는 모두 저렇게 생겼지?’ 등의.. 나중에 힘이 센 어른이 되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꿈은 지금도 유효하다. 비밀이지만 특허 신청을 받을 아이템도 꽤 있다. 다양한 아이디어들은 모두 일상의 세세한 경험과 감정으로부터 나온다. 그가 특히 사랑하는 것 역시 그런 것들이다. 그것들이 일상의 스토리가 작품이 되고 재미있는 발명품이 된다.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돕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난 후 조금씩 남는 자투리 시간에 그는 카페로 향한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비롯한 평범하고 다양한 잡음들 사이에 앉아있으면 아주 편안해진다. 단 30분이라도 놓칠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거기서 그는 무심히 스쳐 지난 사물과 사람,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한다. 작은 것들이 모여 어떤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무언가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시킨다.
디자인아티스트로서 만드는 다양한 삶
영국에서 있었던 ‘디자인 100%’ 전시에 참여하여 주목받은 이후, 해외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찾고 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에는 센터까지 만들어졌다. 구글 본사에는 <나무가 책이 되고 책이 나무 되네>가 두 점 들어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국내보다 상당히 높은 가격에, 배송료까지 부담해가면서 주문하는 해외 고객들에게 그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두 개의 방향으로 잡았다. 제작비 단가를 줄여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성품 라인,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가구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컨셉을 강조한 ‘오튀꾸튀르’ 라인이 그것이다. 주부로서, 디자이너로서, 예술가로서, 그리고 사업가로서의 기회와 가능성을 가능한 한 놓치지 않으려 하는 그는 바쁘지만 지금이 너무 즐겁다.
하지만 소은명은 자신이 ‘가구 디자이너’로 남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디자인아티스트’란 생소한 호칭으로 불리길 원한다. 그녀가 또 다른 스토리를 발견할 때마다 그 표현 방식은 다양하게 바뀔 것이다. 아직 예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은 자유롭고 한계가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와 소통이 있을 것이다. 어느 커피숍에서 끈질기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자라난 그만의 감성의 줄기가, 또 우리와 대화를 나누려 다가올 것이다.
글. 민소연/객원에디터 사진. 박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