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긍정적 당위보다 부정적 당위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가?
-
‘당위’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우리는 주로 ‘부정적 당위’를 먼저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중립적 단어인 ‘당위’를
떠올릴 때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 당위’를 연상하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정적 당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하지 말라, ~는 금지되어
있다 와 같이 금기시, 계율시 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긍정적 당위보다 부정적 당위가 많이 사용 되는가? 이는 ‘어쩔 수 없어서’그렇다. 다시
말해 실현가능성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부정적 당위의 대표적인 사례가 기독교의 계율 중 하나인 십계명이다. 만일 살인을 하지 말라 등과 같은 부정적 당위를 긍정적 당위로 바꾸면 ‘사람을
살려라’가 된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쉬워도 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충분히 지킬 수 있지만,
사람을 살리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 일본에 큰 재앙이 닥친 적이 있다. 이 경우 ‘사람을 살려라’와 같은 긍정적 당위가 통용되는가? 이는 부분적으로 가능할 뿐, 결국 불가능하다. 결국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면 실현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부정적 당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국대 재학기간 자료 (2006~2013) > 윤리학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생각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이론적 도구로써의 이타주의 (0) | 2012.03.05 |
---|---|
내가 생각한 결과주의 윤리설과 비결과주의 윤리설 (0) | 2012.03.05 |
내가 생각한 윤리학의 성격과 그 한계 (0) | 2012.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