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톨로지는 다시 말해 편집학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한 마디로 편집학이라 정의한다.
-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창조는 편집이다.
- 정보 독점은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 오늘날의 지식인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다
- 오늘날의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 국가 공인의 지식권력이 보장하고, 세계적 지식 권력에 의해 검증된 국가적 자부심인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에 의해 처절하게 붕괴된 것. 지식 편집의 독점권을 가진 대학의 붕괴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이다.
- 종이 위에 쓰인 텍스트 중심의 논문식 지식 편집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 인간의 생각은 사용하는 도구로 매개된다.
-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는 이 과거의 현재 혹은 현재의 과거라는 해석학적 맥락과 아울러 동양의 서양 혹은 서양의 동양이라는 해석학적 맥락이 이중적으로 교차되는 지점에 서 있다.
- 이어령은 텍스트의 끝없는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모험을 시도한다.
- 한국학생들은 노트를, 독일학생들은 카드를 쓴다.
- 이제 실력은 '잘 찾아내는 것 know-where'에 있다. '검색'이 곧 실력이라는 이야기다.
- 지금까지 미래창조과학부가 무슨 활동을 하는지 국민들은 별로 아는 바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부 부처가 만들어졌다고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다. 헤매는 것이 당연하다.
-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수천 년간 지탱해온 권력적 지식 구조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트리식 분류에 따른 계층적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지식 체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식이다. '날아다니는 생각'을 마우스와 터치로 잡아내는 하이퍼텍스트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지식 체계가 출연한 것이다.
- 카라얀은 '음악과 영상의 편집'이라는 21세기적 에디톨로지의 선구자다. 클래식 음악의 영역으로만 그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 '왜 인문학인가?'에 관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한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당야한 방식을 배우는 일이다. 세상을 '좌' 아니면 '우'로만 보고, 내 편이 아니면 바로 적이 되어버리는 형편없는 시대이기에 인문학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인문학은 나와 다른 시선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전제로 한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 근대 이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서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몰락했떤 이유는 다들 이야기하듯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 도대체 동양은 왜 과학기술의 발전이 늦었냐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의 부재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는 '객관성'과 '합리성'이다.'
- 르네상스 시대 원급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옿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라는 단어를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으로 대체한다.
- 계층적 분류 체계와 달리, 네트워크적 지식은 각 정보들의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다. 유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 맥락에 따라 관계가 매번 달라진다. 일시적으로 계층구조의 형태를 보일 때도 있지만 이내 사라진다.
- 근대 이전의 문헌에서 각 개인의 연령이 정확히 기록된 경우는 거의 없다. 개인의 나이 따위는 한 개인을 설명하는 데 그리 중요한 카테고리가 아니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윤리적 범주였을 뿐,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와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 인간의 의식을 카능케 하는 각종 근대적 개념이 역사이 한 귀퉁이에서 편집되었다는 것이 에디톨로지적 인식론이다.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역사관과, 역사의 내용은 언제나 편집되고 구성된다는 에디톨로지적 인식론은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이다.
- 인간은 텍스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바로 '나'다. 이를 Identity, 즉 자기 정체성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를 자기 자신으로 Identify(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31-16-11 / 2016-12-24 /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신기주)
-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드오
- 경쟁에 노출된 남성은 본능적으로 준거 집단 안에서 허세를 부리게 된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허세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역설적으로 허세가 사라진 남성은 나약해진다. 명예는 품격 있는 허세다. 저항 역시 무모한 허세다. 허세는 남자를 위험하게 만들지만 허세가 전혀 없는 남자는 멋이 없다. 명예롭지도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허세의 이중성이다.
32-16-12 / 2016-12-24 / 커피 한잔 할까요 1~ (허영만)
33-16-13 / 2016-12-24 / 삼국지 같은 꿈을 꾸다 (조경래)
34-17-1 / 2017-01-01 / 서른이면 달라질줄 알았다 (이동귀)
35-17-2 / 2017-01-04 / 지금 사랑을 시작하는 그대에게 (장재숙)
- 사랑은 내 감정만으로 불충분하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그대로도 사랑이지만, 그 감정을 상대가 사랑이라고 느낄 때 비로소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니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36-17-3 / 2017-01-08 / 카페에서 읽는 세계사 (구정은 외 2명)
37-17-4 / 2017-01-10 / 화를 참지 못하는 세상에서 정신적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 (가타다 다마미, 이소담 역)
- '소심한 상사'일수록 더 많은 정신적 폭력을 시도한다.
- '나는 정의롭다'라는 생각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많다.
- 가치관의 획일화는 다시 말해 '시야가 좁아진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옳다'라는 딱 한가지의 정답과 개념에 사로잡혀 '이것 이외의 가치관'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게 옳으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 '그건 틀렸으니까 그만둬야 한다', '아내는 이래야 한다'라는 식으로 정신적 폭력을 행하는 것도 가치관의 획일화다. 물론 그 이면에는 자기애, 부인, 치환 등 다양한 감정이 숨어있겠찌만, 남편이 획일적인 가치관을 지녔기 때문에 '내 정당함을 강요하려는'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38-17-5 / 2017-01-11 / 표현의 기술 (유시민)
- 우리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해서 상투적인 생각과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정관념, 선입견, 이념적 교조에 지배당하는 것이죠.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p.52)